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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좋은 정보

중세 봉건제 사회:: 계급의 세분화

by 에벤지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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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봉건제사회는 4세기부터 14세기 무렵까지 천 년 정도의 시기다. 

 

중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고대 말기에 있었던, 역사적으로 매우 독특한 사건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만 한다. 이 이야기는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약 400년 동안의 이야기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생겼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그리고 방금 1세기부터 4세기까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고대는 기원전 1세기, 기원전 5세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도대체 세기를 나누는 기준은 어떻게 정해진 것인가? 그것은 잘 알려진 대로 예수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1년으로, 1세기의 시작으로 결정되었다. 역사적 사료를 고려하면 1년이 정말 예수가 탄생한 때인지는 아직까지도 의심스럽다. 대신 역사가들은 기원전 4년에서 기원후 6년 사이에 그가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몇 년에 태어났는지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몇 년에 태어났는지도 불명확한 예수라는 인물의 영향력이다. 도대체 생전에 그가 무슨 일을 했기에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된 것일까?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친숙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적 대화를 위해서는 당신이 불교도이더라도, 무슬림이더라도, 유교적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더라도 최소한의 내용은 알아두어야 편리하다. 

물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은 불편한 강요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생각보다 불공평했다. 근대와 현대는 백번 양보해도 서양 중심의 역사이며, 이 시기의 동양은 항상 지배받고 교화되어야 하는 식민지였다. 세계의 주인공은 안타깝게도 서양임이 분명한 것 같다. 중국이 떠오르고 있고, 세계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겨룰 것이라는 분위기가 동아시아를 뜨겁게 달구고 있으나, 중국의 변방에 붙어 있는 한국에서는 아직도 취업을 위해 영어를 공부하고, 할리우드 영화를 즐겨 보며,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인 개신교와 천주교를 믿고, TV나 잡지 광고의 이상적인 모델로 서양인이 등장하는 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감상한다. 

 

이러한 서양의 영향력이 문제인지 아닌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대신 우리가 함께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사실로서의 서양의 영향력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근대와 현대의 세계가 서구의 세계였음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세계의 역사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서구의 문화와 종교, 사상의 뿌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서구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관통하는 근원적인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그것이다.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역사적 사조로서, 우리가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제우스나 아폴론 등의 다신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반면 헤브라이즘은 야훼나 여호와, 하느님 등으로 불리는 유일신과 이스라엘 민족의 계약에 대한 역사적 흐름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들을 말한다. 쉽게 정리하면 서구는 두 가지 문화를 뿌리로 한다. 만약 우리가 서구 사회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교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리스도교의 핵심 인물인 예수와 유대인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고자 한다. 

1세기가 되면 고대 이스라엘의 작은 도시 나사렛에서 예수라는 인물이 성장한다. 이 시기의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때의 로마는 지중해를 바탕으로 세계 패권을 장악한 거대 제국으로, 지금으로 말하자면 미국의 영향력에 버금가는 국가였다. 반면 이스라엘 민족은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았고, 문화적으로는 신과의 계약인 율법을 중시하는 독자적인 유대교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이스라엘의 민족종교가 유대교였다. 그리고 예수는 이러한 식민지 이스라엘에서 탄생했다.


이후 장성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유일신의 뜻에 따라 예수의 가르침인 복음을 전파하러 이스라엘 전역을 떠돌았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율법을 이해하는 부분에서 당시 유대교 신학자 집단인 율법학자들과 충돌했다. 왜냐하면 예수는 형식화된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예수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판단은 인정과 거부의 양극단으로 나뉘었다. 그러던 중 예수는 반대자들의 고소와 제자 중 한 명인 가리옷 유다의 변절로 잡혀갔고, 로마의 유대 지역 집정관인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이 시기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로마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쉽게 비유하자면 로마는 일본, 이스라엘은 식민지 조선, 그리고 집정관 본디오 빌라도는 이토 히로부미 정도가 되겠다.

어쨌거나 빌라도 앞에 끌려온 예수는 풀려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유대 민족의 명절 중에 과월절이 있는데, 이날에는 죄수 중 한 명을 풀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고소가 접수되어서 잡아오기는 했지만, 빌라도는 예수의 남다른 포스를 보고 처형하기가 껄끄러웠다. 중동 지역에 살고 있는데도 북부 유럽인처럼 하얀 피부, 길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파란 눈동자까지, 게다가 머리 뒤에는 후광도 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중세 회화의 영향이 큰데, 중세 회화에서 예수가 북부 유럽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유럽 지역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남다른 포스의 예수와 강도 바라바를 두고 유대인이 선택하게 했다. 유대인이 원하는 한 명을 살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유대인은 바라바의 석방을 선택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으로 볼 때, 어쩌면 적절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바라바는 로마에 저항해서 폭동을 주도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대인에게 바라바는 독립운동가였다. 정체가 불분명한 예수보다 현실적으로 민족을 대변하는 바라바가 유대인에게는 더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잘 알려진 대로,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선고받은 후 골고다 언덕에서 생을 마감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고, 흩어진 제자들을 모아 초기 그리스도교의 기반을 닦게 했다. 

 

이후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박해를 받으며, 지하 무덤이면서 동굴인 카타콤에서 비밀스럽게 예배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역사에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4세기, 분열되었던 로마를 통일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박해의 대상이었던 그리스도교를 로마 국교 중 하나로 인정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마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서는 식민지 민족의 종교인 무속신앙을 일본의 국교로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발생한 그리스도교는 세계적 제국인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유럽 전체로 그 영향력을 뻗어나갔다.


원시 공산사회를 지나 고대 노예제사회에 이르러 토지와 영토라는 생산수단은 왕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것은 물질적 측면에서 왕의 권력을 확보해주었다. 그런데 왕은 여기에 더해 신을 요청함으로써 정신적 측 면의 권위까지 보장받게 되었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안정적인 절대 권력은 오랜 시간 동안 계급 사회가 유지되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중세 봉건제사회가 되면 사회 계급은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분화되었다. 국왕과 노예 사이에 성직자, 영주, 귀족, 기사, 농노가 생겨났다.   

이 중에 중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계급은 영주다. 영주는 성의 주인으로서 성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 해당하는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장원은 쉽게 말하면 영주의 사유지다. 직접적으로 영주의 영향권에 놓인 까닭에 장원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산물은 영주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즉, 장원은 영주의 생산수단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생산수단을 소유하면 생산물을 소유하게 되고, 이로써 생산수단의 소유자는 권력을 갖게 된다. 여러 영주들이 한 명의 국왕 아래 있었고 장원도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봉토였지만, 영주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한 이상 실질적인 권력은 영주에게 있었다.


영주들은 더 큰 권력을 위해 서로의 영토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이해 충돌은 영주들 간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분쟁을 조율해줄 절대적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이 빈번해지자, 영주들은 자신의 장원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벽이 두껍고 높아야 적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 사회를 거친 국가는 성을 소유하게 되었다. 유럽과 중국, 일본에 성이 있는 것은 그들이 중세를 거쳤기 때문이다. 반면 영주들에 의해 지방으로 권력이 분산되지 않고 국왕 중심의 집권적 체제를 유지했던 한반도에는 거대한 성이 없다.


A는 왕이 되어 지배자의 삶을 살았고, B는 농노로서 평이한 삶을 살았다. 기본적으로 중세의 모습은 고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명확하고 사회는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A는 더 이상 자기 스스로를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세가 그리스도교의 문화권에 있어서였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 아니라, 인간이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우주의 창조주로서 절대적인 지위를 갖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는 사회에서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국왕은 신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통치의 권한을 인정받은 존재였다. 그 권한은 성직자가 인정해주었고, 그 대가로 국왕은 성직자의 지위와 교회의 재산을 보장해주었다. A는 여전히 생산수단이라는 물질적 측면과 종교의 인정이라는 정신적 측면 모두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했다. 따라서 B는 A의 지배에 불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만큼 사회가 견고했던 것이다. 이렇게 안정된 사회가 가능했기에 중세는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세 후기가 되면 견고했던 사회 분위기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첫 번째 원인은 상업의 발달에서 찾을 수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부를 축적한 상인 계급이 등장했다. 이 새로운 계급은 고대와 중세의 유일한 생산수단인 토지를 이용하지 않고도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배층의 권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또 스스로도 자유로워지려 노력했다.


두 번째 원인은 공장의 탄생에서 찾을 수 있다. 18세기가 되면서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고, 이 장치는 물을 끓여서 발생한 수증기로 터빈을 움직여 기계를 작동시켰다. 이러한 증기기관이 당시에 발전하고 있던 분업 시스템과 만나게 되었다. 분업은 한 명이 하던 복잡한 일을 여럿이 분담함으로써 일의 효율을 높이는 작업 방식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편
인문 분야 국내 작가로는 드물게 200만 부라는 더블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작가, 출간하는 책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를 달성한 작가, 강연마다 청중이 꽉 들어차고 끝난 지 2년 넘은 팟캐스트가 아직도 상위권을 달리며 많은 사람이 기다려온 작가. 채사장이 5년 만에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신작으로 돌아왔다. 작가 특유의 유머와 필력으로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고 지루한 것을 재밌게 정리하는 기술은 여전하다. 다만 이전 시리즈에서 그의 현실 감각이 빛을 발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오랜 기간의 사유와 통찰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현대인은 여러 블랙미러를 통해 하루에도 수많은 지식과 접한다. 그런데 이런 파편적인 지식들은 대부분 금세 휘발되고, 삶에 자리 잡지 못한다. 왜일까? 그것은 이 지식들을 이해하기 위한 지식의 배경이 약하기 때문이다. 지식의 종류는 많겠지만, 어떤 지식을 알려면 꼭 필요한 선(先)지식이 있다. 이것은 나와 세계를 이해하게 하고, 개인의 관점과 세계관을 형성해주며, 일상에서 파생되는 지식들을 주체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번 책 [제로] 편은 당신이 진정한 지적 대화를 하고 싶다면 제일 먼저 접해야 하는 가장 근본 지식을 담았다. 이 책이야말로 지식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게 할 것이다. 나와 삶을 ‘나아지게’ 하는 바로 그 목표 말이다.
저자
채사장
출판
웨일북(whalebooks)
출판일
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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